질병은 생명체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인류보다 몇백 배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질병의 역사는 생물의 역사이자 지구의 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들이 겪는 질병의 바탕에는 그러한 자연사적인 측면도 있지만, 인류가 문명을 이룬 뒤 더 중요하게 작용해온 것은 질병의 사회사적인 특성이다. 이것이 이 책 『문명과 질병』의 주제이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개체라기보다는 사회적 존재의 성격이 더 뚜렷한 “인간의 질병은 사회와 문명이 만든다. 그리고 질병은 다시 인간의 역사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논지가 이 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인간사에서 질병이 가지는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데 역사적․문명적 관점이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견해도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지거리스트에게서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당시까지 그러한 논지와 연구결과들을 잘 정리했으며 더욱이 그러한 논지를 일반 교양인들에게까지 널리 전파한 데 큰 의의가 있다.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근대적 의학사(醫學史)를 학문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던 미국에 보급,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거리스트는 이 책을 통해 질병에 대한 문명적·역사적 관점을 제시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