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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어두운 산 시대의 육중한 닻을 진실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싶었습니다.” 임철우(소설가)
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실을 들었을 때, 솔직히 그리 싫지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10여 년 동안 혼자서 혼신을 바쳐온 노력에 대해 누군가 조금쯤은 인정해주고 또 치하해준 것이리라는 생각이 저의 못난 허영심을 은근히 부추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쪽 같은 정신으로 민족의 역사를 보듬고 나아가라 하신 단재 선생의 준엄한 뜻을 기리기 위한 상임을 알았을 때, 문득 가슴이 무거워졌습니다. 제 자신이 그리고 초라한 작업의 결실이 과연 그에 합당한 무게를 지닌 것인가 하는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작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민 지 꼭 17년이 됩니다. 대략 4, 50편의 중단편과 몇 권의 장편을 발표해온 그동안 제게는 언제부턴가 늘 ‘5월 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습니다. 이번 수상작이 된 『봄날』 역시 광주항쟁을 다룬 것이고 보면, 싫든 좋든 아무래도 제겐 그 꼬리표가 운명적인 듯합니다. 그 불행한 시대를 헤쳐나온 많은 이들에게 그러하듯, 제게도 5월은 운명적인 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 격한 물살에 휩쓸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혹은 평생 지우지 못할 정신과 마음의 외상을 얻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바로 그 강과 마주쳤을 때 저는 26살의 대학생이었고, 폭풍에 떠밀려 그 강물을 건너오고 난 순간부터 저는 더 이상 예전의 저일 수가 없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순진한 문학청년의 꿈은 뿌리째 처참하게 뒤집혀버리고,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분노, 증오와 허무의 수렁에서 오래도록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엄청남 폭력과 집단살육을 음모하고 저지른 자들에 대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로 뒤바뀐 추악한 시대에 대해서! 무엇보다 그것이 이렇듯 쉽사리 잊혀지고, 온갖 수사법으로 치장된 채 정략적으로 적당히 정리되어가는 이 비정하고 부도덕한 현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나 끝내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부끄럽게 살아남은 제 자신의 죄책감 때문에, 저는 고통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그날 그 폭풍의 한가운데서 수없이 확인했던 저 놀라운 광경들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초라하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소리 없이 지펴지던 지순한 인간애와 정의로운 불씨들을. 그리고 그 작은 불씨들이 어느 한순간 수천수만의 불덩이로 피어오르고, 마침내는 거대한 불의 강, 불의 바다를 이루며 도도히 넘쳐흐르던 그 장엄한 인간의 신화를……. 오늘, 이 현란한 세기말의 서울 한가운데서 다시 돌이켜보아도, 그것은 제 스스로도 좀체 믿기지 않을 전설 같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전설도 신화도 아닌, 제 기억 속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우리 모두의 진실임을, 역사임을 저는 압니다. 역사 선구자의 몫이 사실 자체를 정확하게 밝힘과 아울러 그 역사적 의미까지 올바르게 부각시키고 정리하는 데 있다면, 소설의 고유한 몫은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소망과 절망, 아픔과 분노, 기쁨과 슬픔의 생생한 몸짓과 육성과 숨결까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형상화해내는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바로 그 소박하기 그지없는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 소설을 쓰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소설은 완성되었고, 더러는 허술하고 부족한 점투성이일 것입니다. 이 작은 소설은 어쩌면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어두운 한 시대의 육중한 닻을 진실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하나의 미미한 소설적 작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소박한 노력을 가상히 여겨 이 상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꾸지람으로 알고 이 뜻깊은 상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