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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제6회 단재상 학술부문 수상소감
학문성과 운동성의 조화 추구
“단재사학은 극복과 지양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민족사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소중한 유산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만열(숙명여대 교수ㆍ역사학)
존경하는 단재상 운영위원님들과, 이 학술상을 제정하여 6회까지 이끌어오고 있는 김언호 사장 이하 한길사의 여러분들, 전도된 양심을 회복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한편 이 시대의 분노와 아픔을 시로 승화시켜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많은 고난을 겪어오시며 오늘의 이 수상의 자리를 더욱 빛나게 해주신 김남주 시인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이 수상을 축하해주기 위하여 바쁘신 중에서도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합니다.
단재 학술상 수상에 즈음하여 본인의 단재사학 탐구의 노정의 일단과 단재사학의 앞으로의 과제를 중심으로 수상소감을 말하고자 합니다.
해방 이후 한때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학계에 소개되기 시작한 단재는, 6·25와 그 이후의 동서냉전의 와중에서, 다른 민족주의 사상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차차 사라졌습니다. 그 시절 고 홍이섭 교수 등에 의해서 단재 소개가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습니다만, 1950년대의 극렬했던 동서냉전체제의 여파는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 이념과 그 운동을 전면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해방 이후 6·25를 전후하여 친일파 및 거기에 동조했던 세력들이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던 그 시기에, 철저하게 항일 민족운동가로 일관되게 살아갔던 단재가 그 시대에 소외되어야 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단재 선생이 우리 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4·19혁명 후라고 생각됩니다. 4·19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냉전체제의 희생물로서 동족상잔의 뼈아픈 아픔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에게 올바른 민족주의 운동을 새롭게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전기가 되었습니다. 4·19세대의 한 사람으로 자부하는 본인이 단재 선생의 사상과 사학에 눈뜨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깨닫는 것이 더디고 시대 조류에 민감하지도 못한 본인이 단재 선생의 사학에 접하게 된 것은 4·19로부터 10여 년 지나서였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만, 『대한일보』라고 하는 신문에 「한국의 학보」라는 글이 여러 학문 분야별로 필자를 달리하여 연재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학 강단에 선 지 얼마 되지 않은 본인에게 국사학 분야를 집필해달라는 청탁이 왔을 때 극구 사양했지만, 그 청탁의 배후에는 은사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순종하는 마음으로 집필에 임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본인은 한국의 역사학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단재 신채호를 포함한 민족주의 사학의 큰 흐름이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 본인이 단재 연구에 발을 딛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은사 김철준 교수의 당부로 『서울평론』이라는 잡지에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주석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이 주석 작업을 통하여 본인은 단재 선생의 독서 세계가 매우 넓어서 도저히 따를 수 없다는 것과 그가 얼마나 좋은 기억력을 갖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고, 그 시대의 사람으로는 분석력과 종합력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주석 작업이 그의 광대한 고전 인용을 다 섭렵하지 못하고, 한국의 사서들 그것도 주위에서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와 몇 개의 문집 등에 그쳤을 때 본인이 느낀 학문적인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좌절감은 최근에 추진했던, 단재 선생의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 『독사신론』 등에 대한 주석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상고사』 주석을 끝낸 지 거의 15년이 지났고, 단재사학에 관한 몇 편의 글을 썼습니다만 단재 선생은 아직도 본인에게는 오르지 못할 우뚝한 봉우리로 서 있습니다.
단재 선생의 저작을 주석하면서 본인이 감지했던 가장 소중한 것은 단재 선생의 한국사 인식이 그때까지 배워왔던 우리 민족사와는 매우 다른 인식체계 및 인식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본인으로 하여금 단재사학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날까지 단재사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 깨달음의 자세한 내용을 술회할 수 없습니다마는, 단재사학은 우리나라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을 가능케 한 것이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교 중심 사학과 이른바 재야사학을 접목시켜 주체적인 민족사학을 시도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학문적으로 그의 의도대로 성숙·완성되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당시 망명생활이라는 열악한 조건을 고려할 때, 연구 여건이 제법 갖추어진 지금의 수준에서 무비판적으로 용훼하지 못할 풍부한 내용을 우리는 그의 사학 및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단재 선생은 매우 많은 저작을 남겼고 그 중요한 업적은 대부분 우리 민족사 연구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연구는, 사학 자체에 관한 것이 많지 못한 형편입니다. 본인은, 단재 선생에 관한 연구가, 그의 저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했고 그 자신 가장 깊은 관심을 보였던 역사학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확신하고 그의 사학의 체계와 구체적인 내용을 더듬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연전에 출간된 졸저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는 그런 관심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아직도 단재사학의 핵심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 주변에 맴돌고 있는 형편입니다.
단재사학에 대한 평가가 다양한 만큼, 그것이 후학들에게 주는 과제 또한 여러 가지 입장에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인은 현재 남북의 역사학계가 단재사학을 풍부하게 공유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단재사학이 주는 과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로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단재 선생의 유저를 발굴하는 작업입니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단재 선생의 유저는, 전집에 묶여진 것보다는 훨씬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전문되는 바에 의하면 북한에 몇 종의 유저가 있다고 하는 바, 아직도 그 입수가 여의치 않은 형편입니다. 단재 선생의 유저의 발굴 못지않게 서둘러야 할 것은 현재 그의 저술로 알려져 있는 글들의 모두가 단재 선생 자신의 것인가에 대한 재확인 작업입니다. 발굴을 통한 유저의 보완과, 재확인 작업을 통한 유저의 판별은 단재사학 및 단재사상을 더욱 정확하게 만들 것입니다.
둘째, 단재 선생이 인용한 자료들의 검색과 거기에 대한 정확한 주석입니다. 그의 역사저술은 초기의 것을 제외하고는 망명 중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가 망명할 때 갖고 간 것은 인정복의 『동사강목』 정도였으며, 북경대학 도서관과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열람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저술의 대부분은 기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인이 그의 저술을 주석하면서 느낀 점입니다. 그가 인용한 자료의 검색과 정확한 주석 작업은 그의 사학의 풍부함과 한계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셋째, 그가 이룩한 사학에서 수많은 독특성을 그가 인식한 구조와 방법론에 따라 현대적인 이해 방법으로 새롭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그가 주장한 ‘전후삼한설’은 한국 고대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그의 주장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형편입니다. 그의 업적을 새롭게 형상화한 후에 현대 우리 국사학계가 이룩한 성과와 비교하고 또한 비판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단재 선생의 독특성은 오늘날 비판·계승·발전시켜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업을 거친 후에 단재사학 가운데, 현대에 비판적으로 계승해야 할 것이 어떤 것이며, 과감하게 지양해야 할 한계가 어떤 것인지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야말로 종래까지 단재사학에 대해서 가졌던 두 가지 극단적인 자세, 즉 배타적 태도와 우상시하는 관점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재 선생의 사학을 비과학적이라 하여 무조건 배격했던 자세나, 단재사학이 주체성을 강조한다 하여 우상시했던 그러한 자세들은 모두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극복과 지양의 과정을 통해 단재 사학은 우리의 민족사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소중한 유산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본인은 단재상 수상자로서 ‘단재’라는 이름이 주는 중요성을 다시 깨달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수상자로서의 본인의 책임과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본인은 그가 살아간 삶에서 학문(사상)성과 운동성의 조화를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민족운동에 참여한 그의 끝없는 정열은 학문의 진지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요, 그의 학문은 그로 하여금 학문만 하는 서생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사회와 민족을 향해 열린 자세를 갖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성과 운동성의 조화를 통해 발견하는 삶의 우선순위는 학문(사상)의 전제 위에서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학문과 운동을 이원적으로 분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학문이 그의 운동성을 자극·격려하였기 때문에 그의 운동성 또한 그의 학문적 시야를 넓혔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한말의 민족운동에 앞서서 신기선의 서재와 성균관의 많은 서책을 섭렵하였고, 만주에서의 저술에 앞서서 만주의 광활한 우리의 역사적 유적을 실제로 답사하였으며, 1920~30년대의 본격적인 항일 민족운동에 앞서 그는 역사연구를 가속화하여 북경대학 도서관과 사고전서를 자주 드나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학문과 운동을 일치시켜야 하는 한국의 지성들에게 주는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단재상은 이를 적극 격려·지원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리며 저의 수상소감을 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