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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삶의 역사 앞에 서서” 노동은(목원대 교수·음악학)
1986년 12월 12일에 서울 함지박에서 12명의 음악인들이 모인 바 있다. 남 보기에 작은 음악 동아리 같지만 나는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힘을 느끼게 하는 모임이었다. 김춘미·노동은·노영해·박미경·박종문·성경희·이강숙·이건용·조선우·조영주·주동률·홍정수 등이 그들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공부하기로 하고 회장에 이상숙, 부회장에 이건용, 총무에 김춘미를 각각 뽑았다. 이름하여 ‘음악학연구회’가 그 첫발을 내디뎠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음학학연구회 음악학연구회는 이후 백대응·송방송·오희숙·이석원·허영한을 새 회원으로 맞이한 것을 말고는, 또 가끔 공개적인 학술세미나와 책자를 발행한 외에는 지금까지 10년 동안 변함이 없다. 여전히 한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씩 자유 주제를 가지고 발표와 토론을 지속하고 있으니 말이다. 10년 동안 우리들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우리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음악으로 밝혀보자는 과제를 확인하였다. 내가 이강숙 선생님을 비롯하여 음악학연구회 회원들에게 감사한 것은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우리들 삶의 역사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말한다면 음악학연구회는 우리들 삶의 음악 역사와 미학의 본산이다. 1987년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부산 동래구 기찰 빨마수도원에서 음악학연구회 8월 모임이 있었다. 그때 이강숙 선생의 「음악학에 있어서의 지식과 신념」을 비롯하여 8명이 발표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으로 나도 발표한 바 있다. 3월 월례모임 때 「조선후기 음·악 연구Ⅰ」을 발표한 지 다섯 달 만에 나는 두 번째의 글을 발표한 셈이다. 원고지 300장 분량의 「한국음악의 제3전환기 선언, 한국음악사에서 新의 해석」이 그것이었다. 그 첫 머리글이 다음과 같다. “지금, 한국음악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서양의 음악문화가 도처에서 백화난만하게 꽃피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지 못하였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문화를 전혀 배울 기회가 없었음을 자각할 때 오는 허무감이다.…… 아울러 우리는 어떻게 민족 고유의 정신과 문화적 특성을 보존·창출하면서 세계화에 부응할 것인가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주목을 싫어할 수는 있어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야 할 집중적 과제로 껴안아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은 주로 한국의 양악 흐름 속에서 축적된 것이지, 결코 한국 고유의 역사철학적 감각 안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한국문화의 역사적 함축이 드러내고 있는 고유 음악의 패러다임 안에서 해석된 지평이 아니라, 그 밖에서 즉 억울하지만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양악사에서의 시각화이다. 그러기에 수용된 양악의 미적 경험과 약식의 방법으로 민족음악을 추구하자는 ‘만남의 과정’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정신적·문화적 특성 안으로 들어와 ‘대화와 수정의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가 느끼는 허무감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한국역사 안으로 들어가 대화’할 때 새로운(新) 창조성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곧 창의력은 그 사회의 역사적 기반에서 대화할 때 비롯될 수 있음을 한국음악사에서 검증해보았던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처음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1890~1936)을 만났던 것이고, 숙연하게 참고할 수 있었다. 단재 선생이 하신 말이 나를 우리 역사 안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는 선언적 말씀이나, ‘세상이 외씨버선을 신으면 나도 외씨버선을 신나니, 이는 노예의 사상’이라고 문예계 청년에게 호소하는 선생의 말씀이 내 삶의 뒤통수를 죽비로 내리쳤던 것이다.
단재 선생의 민족정신을 밑바탕으로 나는 우리 역사 앞에서 다시 한 번 새로움이 무엇인지 무섭게 생각하였다. ‘깨닫지 못하면 황금과 같고, 깨달을 때는 똥과 같다’라는 선가의 때림이 나로 하여금 우리들 삶의 역사 앞에 더욱 자신 있게 설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깨달음의 다짐을 단재 선생이 주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음악이 한국의 역사 안에서 대화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밖에 있느냐라는 문제는 여전히 풀어가야 할 과제이다. 이 과제는 한반도가 지금까지 국제관계로 맺었던 서쪽의 중국(근대까지)이나 남쪽의 일본(근대 이후)이나 동쪽의 미국·러시아를 축으로 한 서양과의 관계에서 변함없는 과제였고, 이 과제는 또한 한국문화의 과제이기도 하였다. 해방공간이 풀어가려고 하였던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과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는 그 특정 공간만의 과제가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의 과제였다는 말이다. 창조적 계승은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들어와 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비판적 섭취는 국제관계에서 우리 음악으로 대화하자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세계화를 모색하자는 것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에서 서양음악 하는 행위가 모두 한국음악이 될 수 없는 것은 한반도 역사 안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의 서양역사를 추종하기 때문이며, 조선시대의 음악을 다루기 때문에 우리 역사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닌 것은 우리들 삶의 역사와 대화 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어서, 이 모두가 단재의 ‘노예문화’일 것이다. 조그마한 몸부림이었지만, 『한국근대음악사1』에서 내가 안으로 음악의 인간화와 밖으로 자주적인 음악을 중심으로 역사 쓰기를 한 것 역시 단재 선생의 빛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본래 역사가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구분으로 말한다면 천민 음악가였다. 80년대 한국음악의 정체성 밝히기를 요청하는 시대가 나로 하여금 ‘우리 역사 앞에’ 서게 하였다. 모든 것이 비루하기 짝이 없었던 학문성을 가지고, 오직 노예사상을 극복하려는 역사인식 때문에 개화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근대를 밝혀보기도 하고, 때로는 일제강점하의 음악사회를 발표하여 지상 고발장이 접수되기도 하고, 조선시대며, 해방공간이며, 북한 바로알기이며, 80년대를 쫓아다니며 한국음악사의 대중화를 모색해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해지는 대둔산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다짐한 사실, 역사 앞에서 두 번 죽지 않는다는 다짐을 80년대 또 하나의 축인 단재 선생의 내리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굳게 지켜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역사와 사상의 커다란 산맥이며, 우리들 삶을 부단하게 일깨워주는 단재 선생의 학술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이 상의 권위는 나만의 개인적 안겨줌이 아니라, 음악계 전체를 우리 역사와 사상의 산맥으로 드높여주었다는 점에서 기쁘게 생각한다. 비천한 저를 뽑아준 단재학술상 운영위원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또 『한국근대음악사1』을 발행하고 한국근현대음악사를 4부작으로 기획해준 김언호 한길사 사장님, 『김순남, 그 삶과 예술』을 출간해주신 이강숙 낭만음악사 사장님, 오늘을 있게 한 음악연구회와 목원대학, 민족음악연구회 여러분, 또 축하공연까지 마련해주신 선생님들,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하여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한없는 마음을, 참으로 고요하게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