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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제3회 단재상 수상소감
아이들의 글쓰기와어른들의 글쓰기
이오덕(아동문학가 ·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대표이사)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우리가 하고 있는 글쓰기 교육은 아이들에게 자기의 삶을 바로 보고 정직하게 쓰는 가운데서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게 하고, 생각을 깊게 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 교육이다. 이것을 우리는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바르게, 건강하게 키워가는 데 있다.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길러가는 데에 글쓰기가 가장 훌륭한 방법이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어떤 모범적인 글, 완전한 글을 얻으려고 아이들을 지도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이전에 살아가는 길부터 찾게 한다. 그래서 쓸 거리를 찾고, 구상을 하고, 글을 다듬고 고치고, 감상 비평하는 가운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고, 남을 이해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고, 진실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무엇이 가치가 있는가를 알고, 살아 있는 말을 쓰는 태도를 익히게 한다. 이것이 삶을 가꾸는 글쓰기다.
삶을 가꾸는 방법의 기본을 말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 대로, 들은 대로, 한 대로 쓰도록 한다. 이렇게 해서 사실을 바로 보아야 삶을 가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붙잡는 것-모든 교육이 여기서 시작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만들어놓은 어떠한 어른들의 생각의 체계도 아이들이 덮어놓고 따르지 않도록 한다. 어른들의 관념·주의·사상·종교-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는 어른들의 이 모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 속에 아이들이 걸려들지 않도록 애쓴다. 이것이 글쓰기로서 하는 생명 지키는 교육, 자유의 교육, 해방의 교육이다.
병들어가는 어른들의 글
나는 오랫동안 아이들의 글을 어른들의 글보다 더 많이 읽어오는 가운데 많은 것을 깨치고 배웠다. 역시 교육이란 이렇게 아이들과 어른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주 중대한 문제를 한 가지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 어른들이 쓰고 있는 글이 전반적으로 크게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남의 글, 어른들의 글을 흉내 내지 말고 자기의 이야기를 자기의 말로, 쉬운 말로 쓰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어른들의 글이 왜 그렇게 어렵고 재미가 없는가?
소설가나 동화작가들이 즐겨 쓰는 말에 ‘미소지었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본래 우리말은 ‘웃었다’이다. ‘웃었다’ 앞에 온갖 다양한 어찌씨(부사)-세계 어느 나라 말에도 그 유례가 없이 풍부하다고 하는 온갖 어찌씨를 그때그때 알맞게 골라서 쓰게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말의 자랑이다. 그런데, 왜 거의 모두 ‘미소지었다’ 한가지로 쓰고 있는지, 참 맛없는 글이 되어간다.
글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이 이러니 보통의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물을 쓴다, 대야를 쓴다고 할 때도 ‘물을 사용한다’ ‘대야를 사용한다’고 써야 글이 된다고 알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최근 체신부가 전국 방방곡곡의 벽에다 붙여놓은 표어에 ‘새로운 우편번호를 사용합시다’란 것이 있다. ‘새 우편번호를 씁시다’ 하면 얼마나 좋은 표어인가.
‘미소짓다’ ‘사용한다’ 따위의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니라 재미가 없는 말이다. 입으로 하지 않는 말을 쓰니 재미가 없다. 또 입으로 하지 않는 말을 글로 쓰면, 본래 쓰이던 순수한 우리말과, 그 순수한 말에 어울려 쓰이던 수많은 말들이 모두 쫓겨나게 된다.
우리말에는 낱말을 잇는 토 ‘와’ ‘과’ ‘이나’ 들이 있고, 어찌씨로는 ‘또는’ ‘혹은’ 등이 있는데, 이런 토나 어찌씨를 써야 할 자리에 요즘 글을 쓰는 분들이 거의 모두 ‘내지’란 말과 ‘및’이란 말을 쓰고 있는 것도 예사로 보아넘길 수 없다. ‘내지’는 한자말이고 ‘및’은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이 두 가지 말을 실제 입말에는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어찌씨가 다른 ‘와’ ‘과’ ‘이나’ ‘또는’ 들을 대신해서 쓰이게 된 까닭이 바로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한자말과 일본말투
요즘 신문이나 잡지나 그밖의 단행본, 인쇄물들에 씌어 있는 글을 보면 온통 이렇게 ‘내지’와 ‘및’ 일색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글이 살아 이는 말에서 멀어져 있는가를 말해준다. 이 ‘내지’와 ‘및’이란 이음말 앞뒤에는 줄줄이 한자말을 꿰달아놓는다. 어설프고 요란한 한자말의 문장체계는 이렇게 해서 이뤄진다. 글쓰는 분들이 하도 ‘내지’와 ‘및’을 많이 쓰다 보니 아주 일상의 말을 쓰는 글에까지 그것을 남용하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아버지 및 아들’이라고 쓸 판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마치 주관적 객관적 모순적 인간적……이라 하여 무슨 ‘적’이란 말을 자꾸 쓰다 보면 그것이 어느덧 실제 말에도 쓰게 되고, 그래서 “시간적으로 바빠서”라든지 “세상적으로 말하면” 하는 말까지 쓰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글을 이렇게 쓰면 우리말이 점점 쇠퇴해가서, 멀지 않아 우리말 전체가 한자말과 일본말로 뒤섞인, 참으로 어설픈 말이 되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말이 우리말글에 침투해 있는 사정은, 수많은 일본말과 일본식 한자말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쓰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일본 말법을 그대로 옮겨 써서 우리의 말법을 아주 파괴해버리고 있는 것이 큰 문제다. 그중 가장 현저한 예가 토씨 ‘의’를 함부로 쓰는 것이다.
본래 우리말에는 토 ‘의’가 잘 안 쓰인다. ‘우리 집’ ‘내 동생’ ‘역사책’이지, ‘우리의 집’ ‘나의 동생’ ‘역사의 책’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글을 보면 ‘의’를 함부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의’를 다른 토에다가 붙여서 ‘에의’ ‘에서의’ ‘에로의’ ‘으로의’ ‘으로부터의’ ‘에 있어서의’ ……이렇게 마구 쓰고 있다. 이런 것이 우리말일 수 없다는 것은, 이것이 실제 입말로 쓰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이런 말은 어느 것도 우리말에는 쓰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 일본말이요, 일본글을 직역한 글투다. 우리말이 일본말로 인해 파괴되는 양상이 얼마나 그 규모가 크고 심각한지는 우리의 상상을 멀리 넘어서 있다.
병든 글은 마음을 병들게 한다
이밖에도 우리가 일본 글투를 따라 많이 쓰고 있는 것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본다’고 써야 할 것을 ‘나는 그렇게 생각되어진다’ ‘나는 그렇게 보여진다’로 쓰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글버릇이 있고, 우리말에는 토로만 쓰고 있는 ‘보다’란 말을 어찌씨로 마구 쓰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잘못된 글버릇은, 지금 날마다 전국의 국민들이 읽고 있는 신문과 수많은 잡지의 기상에서, 온갖 단행본과 인쇄물의 문장에서, 조금도 비판을 받는 일이 없고 반성을 하는 기미조차 없이 널리 쓰이고 있으니 실로 한심하다. 이러다가 앞으로 우리말이 어찌되겠는가? 글자만 한글을 썼다뿐이지, 실속은 남의 나라 말글이 다 될 판이다. 이래서 우리글을 병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병든 글은 그 글에 그치지 않고 말을 병들게 한다. 지금 우리는 모국어의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리고 말과 글을 오염하고 위태롭게 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지식인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말과 글의 관계는 말이 근본이다. 글은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의 글은 말에서 너무 멀리 떠나 있다. 글이, 살아 있는 말이 아니고, 삶에서 우러난 겨레의 말법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글에서만 쓰는 말, 밖에서 들어온 말, 남들이 쓰는 말을 따라서 쓰는 글이 되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살아 있는 말을 피해서 안 쓰려고 한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은 무식하고, 생각이 얕고 시골스런 느낌을 주는 말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말을 떠난 글이 이제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횡포를 부려 순수한 우리말을 쫓아내고 주인 노릇을 하면서 겨레의 마음을, 생각을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즉, 말이 으뜸이던 역사가 글이 으뜸이 되어 말이 글의 지배를 받는 잘못된 역사로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데는 지식인뿐 아니라 백성들을 언제나 지배하고 명령하기만 해온 정치와 행정 관리들도 큰 노릇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말이었던 ‘동무’를 안 쓰고 어른들이나 쓰는 ‘친구’를 쓰게 된 것이 교과서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체신부에서도 ‘XX 친구에게’란 제목으로 편지글을 쓰도록 전국의 학교에 공문을 보낸 일이 있다. 공문 한 장이면 전국의 아이들이 쓰는 말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이 행정이요, 정치의 폭력이다.
지식인의 책임, 교육의 책임
나는 우리말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배워서 쓰고 있는 사람이, 학교의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 그래서 책을 별로 읽지 않은 사람이라고 본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의 말을 배우고, 이런 사람들의 말을 글에서 살려 쓰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말을 지키는 것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요, 혼을 지키는 것이다. 겨레의 혼을 지키고 이어가는 데 글쓰기만큼 중요한 수단이 없는 까닭이 이러하다. 민주사회를 이룩하는 데 언론이 맡고 있는 일의 무거움도 이와 같다.
여러분의 체험적인 느낌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어렸을 때 부모한테서 배운 말을 학교에서 철저하게 짓밟아 없애는 것을 공부라고 하였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가 수십 년 동안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노릇을 돌이켜봐도 그런 교육이었다고 반성한다.
어른이 된 다음에 내가 자유로 선택해서 읽은 책의 대부분이 남의 나라 말글이요, 그 남의 말글을 흉내 내어 쓴 글이었음을 이제 와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라도 죽을 때까지 어머니가 가르쳐준, 조국이 가르쳐준 말, 내 말을 도로 찾아 배워야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