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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제5회 단재상 수상소감
단재 선생은 내게 경이요 충격이요 신비다
조정래 (소설가)
소설 『태백산맥』을 1989년 10월초에 끝냈으니까 그 동안 1년 5개월이 흘러갔다. 세월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짧은 그 17개월 동안이 이상하게도 까마득하게 멀리 느껴진다. 『태백산맥』과 연관해서 생각하자면 더욱 그렇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나는 그 동안을 새로 쓸 작품 『아리랑』의 준비에 송두리째 바쳤고, 내 정신도 오직 거기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태백산맥』의 출간기념회가 끝나면서 『태백산맥』을 완전히 잊기로 작정했다. 그 인위적인 노력은 다음 작품 『아리랑』을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아리랑』의 준비를 위해 책들을 읽어대면서 아울러 취재여행을 시작했다.
나라 밖으로 취재를 떠난 것만도 동남아 일대 두 차례, 중국 만주, 미국 하와이 일대, 일본 북해도를 다녀왔다. 그리고 호남평야 일대를 너댓 차례 훑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정말 『태백산맥』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게 되었다.
『아리랑』의 신문연재에 매달려 1904년을 살아내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뜻밖에 『태백산맥』에 상이 주어졌다는 소식이 왔다. 그걸 계기로 생각을 돌이켜보자니 『태백산맥』이 '세월' 저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태백산맥』을 끌어당겨 생각해보며 차라리 그냥 그대로 잊게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든다. 『태백산맥』에 얽힌 세월과 가지가지 일들을 다시 돌이키는 것이 왠지 무섭고 지겹고 힘겹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재 선생을 생각하며 몸을 바로잡고자 한다. 내가 느끼는 단재 선생은 경이요 충격이요 신비다. 그리고 그분은 대쪽으로 새벽바람으로 서늘함으로 나를 고개숙이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하게 만들며 그리고 똑바로 서게 만든다. 그분의 생각과 실천과 삶은 나에게 여지껏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숙제이고 불가사의다.
"독립운동에 몸 바친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단재 선생은 그 중에서도 출중한 분이셨지. 사학자고 독립투사며 문장가고 논객이었는데, 그분은 어느 한 부분에도 소홀함이 없었네. 민족의 자존을 일으킨 투철한 사관은 단재사학의 산맥을 이루었고, 민중을 힘의 주체로 파악하고 끝까지 행동투쟁을 벌인 독립운동은 가히 독립투사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네.
우남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백범이다, 도산이다, 그 누구든 단재 옆에 서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노릇일세. 나도 감옥살이를 해봤지만 변호사를 거부한 채 법정투쟁을 벌여 십년형을 받았고, 겨울이면 영하 이십 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에 시달리며 지장 하나만 찍으면 가출옥시켜주겠다는 끊임없는 유혹을 뿌리치며 어찌 팔 년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숙인 머리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네. 그런데 끝끝내 옥사하고 말았으니……."
이건 『태백산맥』에서 주인공 서민영의 입을 통해서 하고 있는 말이다. 그분은 독립운동을 위한 대중계몽의 한 방법으로 여러 편의 소설까지 썼다. 그 치열함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나는 감히 그분을 닮아 살기를 욕심부리며 사십고개를 넘겼고 오십고개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게 되었다. 그분의 이름으로 된 상은 바로 그분이 내리는 것이라고 믿고자 한다.
그리고 모든 상은 어떤 일에 대한 객관적 가치의 평가나 결정이 아니라 그 일의 지속을 격려하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번 상을 지나간 작품 『태백산맥』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 쓰고 있는 『아리랑』을 잘 써나가라는 격려의 뜻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단재 선생이 혼신의 힘으로 살다가신 그 세월을 소설로 엮어내며 나도 그분의 뜨거움과 꿋꿋함과 매서움과 차가움을 흉내 내고자 한다.
민족의 역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가신 단재 선생의 위대한 넋 앞에 다시 머리 조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