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소개
home
대표 인사말
home

수상소감

“민족문학의 작은 일꾼으로” 염무웅(영남대 교수·독문학)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을 기념하는 상의 제10회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출판사측으로부터 전해 듣고 저는 적잖이 당황하였습니다. 마치 공부를 열심히 못하는 학생이 교실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선생님한테 갑자기 호명을 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철없던 시절 멋모르고 문단이란 데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느덧 32년이 지났습니다만 그동안 상을 주는 일이나 수상자를 뽑는 일에는 더러 간여해보았으되 막상 본인이 상을 받는 위치에 서기는 난생 처음이라 더욱 얼떨떨하고 당혹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며칠이 지나 수상소식이 신문에 보도되고 친지들의 축하 전화가 걸려오자 상을 받기는 틀림없이 받는구나 하는 실감이 왔습니다. 그러나 흔쾌한 기쁨의 감정은 좀체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흔히 상을 받는 이들이 “커다란 영광으로 알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하는데 저도 물론 예외는 아닙니다. 누구보다 깊이 흠모해 마지않는 단재 선생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인데,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재가 살았던 시대의 가혹함을 되돌아보고 또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혼돈을 살피면서 저는 실로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단재 선생의 생애를 관통하는 불굴의 치열성에 비추어 저의 나태하고 안이한 생활 자세를 반성해볼 때 단지 부끄럽다는 말로는 변명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단재의 사상적·학문적 출발은 한문학, 즉 유학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그가 19세에 성균관에 입고하기까지 그는 정통적인 한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어떤 계기로 낡은 유학의 껍질을 분연히 벗어던지고 애국계몽운동의 선봉에 서서 전투적인 언론인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가장 비타협적인 항일독립투사로 발전하게 되었던가.
단재 선생의 투철했던 삶을 되새기며 그가 남긴 논설들을 읽어보면 단재는 서양의 학문과 역사에 대해서 만만찮은 조예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세계정세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요컨대 그는 정통 유학의 뿌리에서 돋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학문적·사상적 모태를 뛰어넘어 투쟁적인 계몽주의의 제일선에 섰습니다. 이 자리가 단재론을 펼치는 자리도 아니고 제게 그럴 만한 능력도 없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단재가 봉건유학자의 구각을 깨고 나온 것은 어떤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든가 무슨 뛰어난 책을 읽었다든가 하는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국가와 민족의 존망의 위기라고 하는 객관적 현실 자체가 그때그때 단재로 하여금 애국적인 논설을 쓰게 만들고 민족주의적 입장에서우리 역사를 연구하도록 몰고 갔으며, 또 무장투쟁을 불사하는 결연한 실천 활동에 몸을 던지도록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고 보니 70년대 초 단재 선생의 대문장 「조선혁명선언」을 읽고 피가 끓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그 무렵 사학자 홍이섭 선생 댁에서 단재의 아드님 수범 씨를 만난 것도 생각납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밸 없는 대외종속의 암흑 속에서 모자라나마 단재 선생, 만해 선생의 뒤를 따르리라 남몰래 작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20수 년이 흐른 지금 단재 선생의 삶과 글은 밤하늘의 별처럼 여전히 찬연한데, 저 자신은 너무나 지지부진입니다. 단재가 통렬히 매도한 우리 사회의 양대 병폐 가운데 하나는 일종의 도피적 자세, 즉 일종의 보신(保身)주의였습니다. 단재는 이렇게 썼습니다. “온 조선 사람이야 다 죽든 말든 나 한 몸, 한 가족이나 살면 그만이라고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를 찾아다니는 치인(癡人)은 금일에 거의 절종되었겠지만, 그러나 그 심리는 의구하다. 불평등한 이 세계를 한번 뒤집어 모든 동포가 더 행복을 누리자는 심리가 아니요, 오직 한 몸 한 집을 살자는 생각으로 찾아가면 각 과학의 지식을 얻는 중학교·대학교…… 모든 학교도 『정감록』의 청학동이며, 시와 소설을 짓는 문단이나 논설·기사 등을 편집하는 신문사도 『정감록』의 칠옹성이다.” 일신의 안일과 영달을 이루기 위해 대학으로 문단으로 또 언론기관으로 가는 세태를 단재는 『정감록』에 빗대어 이처럼 비판하고 있는데, 아마 이 비판은 단재의 시대보다 오늘의 이 시대에 더 적합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개인적 행복만을 위해서 문학을 해왔다고 하면 그것은 좀 억울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단재의 추상같은 기준으로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민족지식인으로 살아왔는가 묻는다면 저로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혼돈의 시대를 새로운 전환의 토대로 단재가 평생에 걸쳐 줄기차게 배척하고 타매하여 마지않은 것은 다름아닌 노예의 삶, 노예적 사상, 노예문학이었습니다. 남이 하는 대로 덮어놓고 따라하는 추수주의적 자세를 그는 생득적으로 혐오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독립불기의 국수(國粹)사상이 그의 것이었습니다. ‘국수’라는 말은 국수주의라는 말 때문에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기 쉬운데, 단재는 저항적이고 애국적인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 여러 차례 이 낱말을 썼습니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해석한 단재의 사관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 ‘국수’란 바로 그 아의 또 다른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를 다시 대아(大我)와 소아(小我)로 구별함으로써 개인주의·보신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민족적 자아를 상정하였습니다.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고 있습니다만, 요컨대 중요한 것은 단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늘을 살펴보고 또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단재가 의미한 ‘국수’ 또는 ‘대아’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단재도 자기 시대를 ‘열국 경쟁의 시대’라 표현했는데,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시대입니다. 단재가 활동을 시작한 때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오늘 민족학문·민족문화의 정체성은 더욱 위기에 봉착하고 있는 듯합니다. 단재는 전통 학문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민족적 관점에 도달하였으나, 우리 세대는 처음부터 얼치기 서양학문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민족문화의 유산에 까막눈이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독문과를 다녔고 독문학 교수로 밥을 빌어먹고 있는데, 제게 있어서 우리 시와 소설을 읽고 평론을 쓴다는 것은 곧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가 부과한 상처와 멍에를 짊어진 채 민족문학의 작은 일꾼으로 새 삶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부족한 제게 이 상이 주어진 것을 저는 이제 겨우 문턱을 넘어선 인증으로 알겠습니다. 상을 심사하신 분들, 여기 모이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스스로 더욱 정신 차릴 것을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