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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제7회 단재상 수상소감
“진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윤정모 (소설가)
의복이 날개란 우리 속담을 저는 상당히 절감했는데요, 빨간 마후라만 둘러도 사람들이 전부 저 여자 많이 변했다, 왜 이렇게 멋있어졌느냐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변해보일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이 자리에서도 느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서면서 오랜만에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흠모하고 짝사랑하던 민주 · 민족진영, 자유투사들을 우러러보던 이 진영 속에 나도 이렇게 서 있게 되었다는 것, 서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의 한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감격이었습니다.
20년 전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광화문으로 유신탱크가 굴러올 때, 그 당시 『다리』지 발행이었던 김상현 선생님과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임헌영 선생님은 제 앞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 저는 그분들 뒤에서 울었습니다. 그분들의 안정이 걱정이 돼서가 아닙니다. 저는 서 있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처럼 도피할 수도 없고 또 다른 어느 자리에서도 떳떳하게 서 있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 절박한 소외감 때문에 깊이 울었습니다. 제가 사람의 울타리에 서 있고 이 좋은 자리에 저도 소속될 수 있는 오로지 그것만을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원하던 자리에 귀속될 수 있고 또 굳건히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정신적으로 출세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제 길을 찾아 묵묵히 걸어온 분들은 이 감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열등생이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길이라 그토록 더 제게 소중했다는 것도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열등생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눈뜰 당시도 제가 아주 못났다는 열등감이었습니다. 학교 공부도 지지리도 못했습니다. 양친 손에 자라지 못해 가정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여느 아이들은 인간이 지킬 선의와 예의를 알고 행동할 줄도 알았습니다만, 저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저는 반아이들과 함께 담임 선생님 댁을 찾아 갔습니다. 제 담임 선생님은 딸 넷을 두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저는 담임 선생님께, “선생님, 여자 하나 더 얻어서 아들 하나 나세요”하고 얘기했습니다. 제 친구들은 그것을 수치인 줄 알고 얼굴이 사색이 되었는데,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저능아에 가까웠습니다.
그때 담임은 저에게 무안을 주지 않으려고 거두어주시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나쁜 말이라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그때 저는 처음으로 훌륭한 사람에 대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아마 이런 선생님을 일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나같은 열등한 아이에게도 친밀하게 일깨워주는 분, 그런 사람도 있구나 이 세상에는. 그래서 그런 사람을 존경해야 된다는 걸, 처음으로 존경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교원노조로 잡혀가셨습니다. 그 다음에 생물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총각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께 다가갔습니다. 일종의 추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선생님이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시험지 답안지 뒤에 총각 선생님이니까 예쁜 여자를 그렸습니다. 그렇게 답안지를 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정신과에 의뢰하라는 얘기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저를 이끌고 가 짜장면을 먹이고 울면서 병원에 데려갔을 때, 저는 놀랐습니다. 내가 왜 이런 진찰을 받아야 하는지. 그러나 병원에서 어머니에게 의사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정상적인 아이라고! 그 선생이 상당히 속아지가 어처구니같다고. 그래서 저는 돌아와서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보내는 것들이 제 문학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전 이렇게 제멋대로였습니다. 또 난폭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심리를 심리학자는 아마 원초적 본능에 갇혀있는 상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자라면서 본능을 겪고 화를 지를 때도 자연스럽게 습득하는데 저는 그 길을 찾지 못해 오래토록 다듬어지지 않은 문학적 기질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때때로 낭패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전 그렇게 세상일에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너무나 쓰라려서, 그 아픔을 글로 쓰고 싶어했음이 문학에 대한 저의 첫 욕구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쓰면 이 못난 인간도 좀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마 그러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속여가면서 저는 글을 쓰는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학교에도 잘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제겐 열등감만 깊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대학을 나온 덕에 출판사를 다닐 수 있었고 이때 처음으로 세상에 필화사건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세상에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소금이 되는가하면 구속되는 이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 잘난 사람들이 편히 살지 않고 법적 제약을 받으면서 글을 쓰는가? 당시 모일간지의 잠입르뽀라든지 야릇한 글을 감미롭게 쓰던 저에겐 위대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자유실천 문인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고 또 그런 글들을 써보였습니다. 또 정치를 걱정하다가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그 진보적인 발걸음을 홀린 듯 우러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저는 그 진영에 가까이가고 싶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편입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가까이 갈 수 없지만, 이 진영을 내 인생의 최고의 지향점으로 정하고 천천히 그 진영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오늘 저는 그 진영에 함께 서 있습니다. 그토록 높고 멀리 있던, 그래서 그만큼 더 위대하고 우러러보이던 그곳에 저도 한 동참인으로서 끼어들어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달리 저에겐 더 귀하고 소중한 내 진영의 가족들에게 해가 되지 않으려고 좀더 분골쇄신해야 할 텐데도, 돌아보면 제 행위가 결코 그렇게 생각처럼 가다듬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황석영 선생님이 돌아왔을 때 안기부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가족도 만나고 작가도 만나게 해주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기자회견 끝난 기자들이 몰려오면서 황선배의 어린 딸과 아들을 밀어붙이고 허리가 아픈 황 선배를 넘어지도록했을 때, 저는 불끈 사람들을 치밀고 말았습니다. 상소리도 했습니다. 제가 그럴 위치도 아니고 좀더 점잖게 했으면 됐을 일을 그렇게 성급하게 한 것도 다 시장바닥의 품성, 막돼먹은 품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돌아와서 깨닫고 굉장히 속이 쓰렸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주제에 너무도 겁 없이 민주진영을 향해 걸어온 것 같습니다. 더욱이 언어예술은 그 얼마나 고도의 기술과 훈련을 요하는 일이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자동차 정비기술 같은 것을 선택했으면 제게 딱 맞을 것입니다. 자동차의 산 역사가 100년밖에 안된다고 하는데 그 100년의 기술만 습득하면 저도 정비 같은 일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란 수천 년의 고도로 발달된 인류의 보고입니다. 따라서 언어에 있어선 수천 년간의 역사적 배경과 그 정서적 토대 위에서 재창조되는 것임에 부족한 제가 여기에 껴들어서 언어를 가지고 작업하겠다니 얼마나 주제넘은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늘 제 행동에는 불협화음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소중하게 우러러오던 그 진영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일만 하는 것도 제겐 크나큰 영광인데, 제게 또 단재상까지 주셨으니,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정상적이지 못한 성품이나 자기관까지 활력소로 전환해서 아름다운 나날을 꾸며갈 것을 내 진영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약속드립니다.
존경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선후배님들 여러분이 추구하는 그 이상과 희망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추구해야 할 우리의 성역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이것을 지켜나가는 데 제가 동참할 수 있도록 계속 이끌어주시고 충고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