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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정신이 대상을 자신의 소유물로서 점유하고 인지할 때만 자유입니다.” 이균영(동덕여대 교수· 한국사)
단재 선생은 19세가 되던 1898년 향리인 청원에서 상경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습니다. 26세 되던 1905년에는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이 됨으로써 한말의 계몽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선생이 만주로 망명생활을 떠나는 1910년까지 계속됩니다. 그 사이에 남긴 선생의 여러 저술 가운데 하나인 『독사신론』(讀史新論)이라는 책은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이 시작되는 출발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의 근거가 되는 이 책의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발생과 소멸, 그 흥망의 상태를 서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민족을 빼놓고서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며 역사를 버린다는 것은 그 민족이 국가를 중요시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생은 역사가인가. 이에 대한 동의와 부정이 그의 저술에 대한 평가를 갈라놓을 것입니다만 여기에서 일단 선생은 역사 서술의 주체로 ‘민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고취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선생이 말하는 민족과 민족주의란 서구 근대 민족국가 수립 과정에서 형성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성격을 띠는 ‘내셔널리즘’을 수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극복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이 시기 선생의 민족주의사관은 이미 기울어진 나라를 일으키는 투쟁에 이념적 기초가 되기는 어려웠습니다. 1910년대에서 1920년 초까지 선생은 연해주, 만주,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때 선생과 선생의 활동에서 나타나는 명확한 특징 하나는 민족 해방을 위한 비타협성, 그리고 무장투쟁노선으로 대표되는 전투성입니다. 선생은 미국에 기대어 독립하려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상해 프랑스의 조계에서 상징적 의미로 존재했던 상해 임시정부와 결별했으며 마침내 반(反) 임시정부 활동의 맨 앞에 섰습니다. 그는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해 군사통일촉성회, 군사통일준비회 등을 조직했습니다. 1923년 1월부터 현존하는 상해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창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 창조파로 활동했습니다. 해외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따라 일어났던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에서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일제와 혹은 러시아 백위파와 싸웠던 한국인 독립전사 400~1,000명이 죽었습니다. 1920년 말의 이른바 경술참변에서는 일제에 의해 2,500~5,000명의 만주 조선인 이민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자금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임시정부 내부의 동요, 음모와 암살은 정부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조직상의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이 모든 일의 당사자이며 방관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23년 선생은 의열단의 요청에 따라 일명 「의열단선언」이라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함으로써 아나키즘(무정부주의)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조선혁명선언」은 참정권 운동, 자치론, 문화운동론, 외교론과 준비론 등을 단호하게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바쿠닌, 푸르동 등의 사회경제사상을 흡수하여 약탈적이며 사회적 불균등과 노예적 문화현상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제도를 부정하였습니다. 국가라는 단어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민족은 곧 민중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선생은 한말 계몽운동 시기 선생의 사상과 실천에서 보여주던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진정한 민족운동은 ‘민중’의 ‘폭력적 직접혁명’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아나키즘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선생은 청변 개념을 도입하여 정의와 공리(公利)를 신장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피스톨과 폭탄’‘파괴와 폭력’‘혁명적 암살’을 제시하였으며 암살 대상으로 조선 총독 및 각 관리, 매국노, 일본 천황 등을 지목하였습니다. 혁명의 끝은 파괴로부터 개척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특권 계급, 경제 약탈제도, 사회적 불평등, 노예적 문화사상 등을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모든 사상은 시대적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사상은 배후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선생과 그의 아나키즘은 현실에 뛰어들어 자신과 민족과제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아나키스트임을 자처한 선생은 1926년경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연맹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1년 뒤 북경대 교수 이석증(李石曾) 등이 주도하는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담하였습니다.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의 활동으로 선생은 1928년 5월 일제에 검거되었습니다. 대련 법정에서 10년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유폐 8년 만인 1936년 57세로 옥사하였습니다. 선생 역시 수많은 민족운동가들이 그러했듯 굶주림과 병고, 감시와 억압 끝에 죽어갔습니다. 그는 살아서 그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족운동을 연구하는 제 관심 분야에 한정해서 선생의 생애를 대강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부의 정통성을 상해 임시정부에 두고 있는, 분단된 나라의 한쪽에 살고 있습니다. 선생은 바로 그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의 전위적 인물이었습니다. 아나키즘의 사상적 구조는 논외로 치더라도 역사에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오래 전에 이미 학자들에 의해 합의된 내용입니다. 암살과 파괴를 수단으로 삼았던 1920년대 선생의 노성은 과연 어떠한가. 또한 타협을 모르는 근본주의적 선생의 성향이 민족운동전선에 분열만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 않으며 역사를 해석하는 인식의 범주는 철학의 몫입니다. 그럼에도 현재 선생은 민족주의 사학자로, 민족운동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생의 고난과 실패가 민족의 해방, 보편사적으로 곧 사유를 진전시키는 수단이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사상으로서의 ‘파괴와 폭력’은 역사적인 진보를 유인한 사상의 진보였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측컨대 선생이 추구하던 민족해방이 1945년 8월 15일로 종결되었다면 선생은 역사에 존재하지만 역사의 진보에서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선생은 역사적 흐름의 주류에서 자주 비껴 서 있었으며 결국 실패자였습니다만 그의 역사적 지위는 거의 흔들림이 없습니다. 많은 경우, 역사는 승리자들의 것이었고 한국의 근현대사는 그러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제 저는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자유와 진보의 이름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헤겔 이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역사의 기본적인 내용으로 간주한 학자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개체와 보편의 문제가 서로 작용하지만 개인의 인생 역시 자유를 향한 도정입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던 무렵과 비교해보면, 저는 지금 역사학이 취급하는 과거에 대한 낯설음에서 약간 자유로워진 것을 느낍니다. 그 정도는 한 편 한 편의 논문이 쌓여가면서 점점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적인 분위기 역시 그렇습니다. 1970년대 후반, 상을 받게 되는 이 책의 주제인 신간회를 논문으로 쓰려고 했던 시기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경직된 것이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좌익을 다루어야 하는 이 주제를 피해갈 것을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 관심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시대가 젊은이들에게 주었던 상황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일제시기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 진영이 민족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전략과 목표를 유보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민족협동전선으로 결성했던 신간회는 저에게 여러 의미에서 현실적인 주제였습니다. 어렴풋이 분단 현실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일제시기와 미군정기에서 연유한다고 알고 있던 당시의 저에게 일제시기는 단순히 과거로 끝나버린, 괄호 안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또 저는 ‘현실적’인 것이 저를 쉽게 격동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주제를 두고 의무와 인내만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료와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관계 사료를 비교적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대개 1980년대 중반기로 들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그 상대적 자유로움이란 이때 민족·민주주의 운동세력이 크게 성장·확산되어가던 상황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개인의 지적 성취 과정이란 곧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완전한 점유(占有)의 자기 확신에 귀착하며 정신은 그 정신이 대상을 자기의 소유물로서 점유하고 인지할 때만 자유입니다. 따라서 넓고 넓은 사실(事實)의 바다에서 한 역사학도가 온전한 자유의 영역을 확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자연히 역사연구자에게는 번득이는 예지, 직관, 통찰력보다는 겸손과 시간을 마주보고 묵묵히 나가는 성실성이 더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자유를 성취해가는 과정은 또 다른 자유를 구속당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연구로 보내는 시간 자체가 삶의 다양한 체험의 기회를 빼앗으며 어느 경우에는 우리를 기능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성실한 연구자가 있다면 아마 그는 집과 연구실과 강의실을 잇는 삼각형 구도의 생활에 장악되어 있을 것입니다. 세 정점(鼎點)의 안정과 균형을 지키려는 노력이 그의 생활 모두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여러 가지를 잃기 시작합니다. 그를 깊고 풍성하게 해주던 다양한 독서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도 그 흔한 예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의 삶은 조금씩 조용히 정체되고 기능적인 것으로 기울어가기 십상입니다. 가족들이 그를 이해해준다면 그는 행운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에서 자유로울 뿐 다른 하나에서는 상실로 인하여 전혀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삶은 자유를 향한 도정입니다. 그는 때로 기능적이며 정체된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또 다른 자유의 영역을 향해 그가 오래 익숙하던 것들을 죽이고 그것들과 결별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40대 초반이며 자신에 대하여, 이웃, 사회, 민족과 사회, 우주를 향하여 해답보다는 더 많은 의문에 차 있습니다. 성실하게 그 의문들에 다가설 것, 주위의 시선과 자신의 시선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울 것…… 이 단재 학술상이 제게 그러한 계기를 주었으면 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 한길사, 저를 축하해주시기 위해 바쁜 시간을 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