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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제5회 단재상 수상소감
구체적 삶 속에서 학문과 실천을 통합한단재 선생의 불굴의 자세 배울 터
최장집 (고려대 교수 · 정치학)
저는 먼저 단재상 심사위원 선생님들께서 저를 제5회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제가 단재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저의 솔직한 심정은 수상의 기쁨보다는 송구스러움과 무거운 부담감이 앞섰습니다. 그 이름의 무게는 저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상이 우리 민족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엄혹한 식민통치시기에 민족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투쟁하신 단재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상이고 보니, 제가 과연 단재 선생의 삶과 그분의 정신에 부합되는 그 무엇을 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단재 선생의 삶의 궤적이 오늘의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민족자존과 민족해방의 이념 및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 요구되는 학문적 준엄성,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시에 선생은 학문활동을 단지 정신의 내면적 세계를 구축하고 자족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학문과 실천을 결합하려는 불굴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1회로부터 4회에 걸쳐 앞에서 수상하신 선배 선생님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저는 더욱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분들은 우리 사회 비판적 학문분야의 제1세대로서 각자의 영역에서 이미 단재 선생이 정신에 부합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주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평등을 위한 실천의 장에서도 모두 큰 업적을 쌓아오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되돌아보면 앞서 수상하신 선배 선생님들 세대는 해방 · 분단 · 전쟁 · 전후의 혼란 · 4·19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격변의 시기를 살았고, 학문활동과 실천운동을 함께 해오신 분들입니다.
이에 비한다면 우리 세대는 상대적으로 사회가 안정된 시기에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최초의 한글세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물학적 연령차이를 생각한다면야 넓게 보아 동일한 세대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교육과 학문활동에 있어서 저는 그분들의 다음 세대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리고 저 또한, 스스로가 새로운 세대로 생각하면서 학문에 임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세대는 사회적 조건에 있어 상대적으로 지적 · 학문적 행위를 함에 행복한 세대라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드리는 말씀이 우리 세대가 앞서의 선배세대에 비해 민족적 · 민중적 가치와 이념에 부합하는 학문활동을 통해 더 큰 업적을 내고 있다거나, 또 낼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결과는 오히려 반대일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시대적 조건과 그 시대 상황에 대면하는 우리의 의지와 자세를 돌아보건대, 많은 경우 우리 시대의 학문은 진리와 정의를 지향했던 참다운 지적 행위의 의미를 상실한 채 입신과 영달의 수단으로 전락하였다는 비판적 성찰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세대가 학문활동을 하는 현재의 가치와 문제의식은 어떻게 정의롭게 사느냐, 어떻게 올바르게 사느냐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잘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존중되고 있는 측면이 많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시대적 조건과 상황이 이렇기에 학문과 현실에 대해 결연했던 단재 선생의 엄격한 자세가 지금 이 시점에서 더 요구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현재의 우리 학자들의 이중의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학문을 하기 위한 여러 사회적 조건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 학자들이 딛고 있는 민족적 현실은 결코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단재 선생께서 마주했던 때보다도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지도 모릅니다. 달리 말씀드려 현재의 민족의 상황은 단재 선생이 직면했던 때보다 나아졌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때의 모순이 누적적으로 쌓여온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 민족자주의 문제, 경제적 평등의 문제, 그리고 민족의 통일문제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민족적 상황은 이 땅의 학자들에게 단재 선생이 추구하려고 했던 정신들을 방기하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여 저는 오늘의 시점이야말로 비판적 · 실천적 학문이 더욱 요구된다고 생각하며, 단재 선생이 끝까지 추구했던 자주 · 평등 · 자유의 정신이 지니는 중요성 또한 오늘날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연유로 단재 선생의 가르침과 그가 남긴 교훈은 오늘에 더욱 절실하고 또 새롭게 되새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단재 선생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중요한 것은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경우 우리 민족의 과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나아진 조건을 이용하여 그에 안주하거나, 부조리한 현실을 외면 또는 회피하고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제 생각에 그 정신과 부정의의 현실 조건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 양자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러한 조건에 직면하여 요구되는 학자의 감연한 비판정신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어쩌면 이 상을 제가 수상하게 된 것도 부분적으로는 한글세대 학자들에 대한 격려 못지않게 따가운 채찍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학문, 그 중에서도 비판적 정신으로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에 대해 이 사회가 줄 수 있는 보상은 지극히 제약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학문공동체의 형성과 이 공동체 내에서의 도덕적 연대와 격려는 매우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우리 세대의 일반적 학문경향에 대해 앞에서 제가 드린 말씀도 상당 부분 자기 반성의 의미가 크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다른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제 학문 분야라고 할 사회과학, 보다 좁게는 정치학 분야에서만도 저보다 훌륭한 연구와 큰 업적을 쌓으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으로 압니다. 다만 상이라는 것이 기왕의 업적이나 활동에 대한 평가의 결과라기보다는 앞으로 더 분발해서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뜻이라고 이해합니다. 제게 주신 이 상도 그런 의미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단재 선생의 뜻을 부응하고, 어려운 시대에 학문과 민족민주운동의 장(場)에서 단재 선생의 뜻을 오늘에 되살린 선배 수상자 선생님들의 전범과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끝으로 더욱 정진하겠다는 말씀을 덧붙이며 수상소감에 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