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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신분사 2007-04-23
클류쳅스키, 러시아 역사학의 황금기를 개척한 중심인물
“러시아의 신분적 불평등은 부당하다. 신분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듯이, 차별이 소멸될 때가 도래할 것이다.”


“앞으로는 자본의 힘이 정치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다른 힘,
예컨대 학문이나 지식에 자리를 내주게 될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힘을 가지고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꿈꾸어왔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그런 꿈을 꾸고 있다. 이러한 힘을 가동하게 될
국가조직 속에는 평등도 없게 될 것이며,
신분도 없을 것이다. 신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사람들은
‘학위’를 가진 인물들서, 재산에 의한 특권 덕분에
입법기관에 선출된 의원들이 물러나고
학위를 가진 학자 출신 의원들이 들어올 것이다.”


클류쳅스키, 러시아 역사학의 황금기를 개척한 중심인물
1991년 말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인들이 소련 시대의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정 러시아 말기의 대역사가인 클류쳅스키(1841~1911)와 그의 역사학이 지닌 의미는 매우 크다. 그는 러시아의 사회경제사 분야에서 중요한 저술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모스크바 역사학파’가 성립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널리 명성을 얻은 학자였다.

클류쳅스키는 1841년 펜자 지방의 보스크레센스키 마을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하급 성직자로 생활해오고 있었는데, 클류쳅스키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직접 농사일도 했다. 이런 생활을 통해 그는 하층민들의 생활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어릴 때의 경험이 그의 학문세계에도 지속적으로 반영되었다. 클류쳅스키가 청소년기를 보내던 1850년대의 러시아는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러시아는 크림전쟁(1853~56)에서 패배한 충격으로 체제 개혁을 위한 필요성을 점점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마침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1861년은 농노해방이 공포된 해로 농노문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20대 청년이었던 클류쳅스키는 당대의 많은 러시아 지식인처럼 러시아가 변혁되고 인민의 생활이 개선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그는 카라코조프와 같은 과격 학생들에게 동조하지 않고 비참여파로 남아 있었다. 비록 인민의 복리를 달성하려는 목적이라 할지라도 폭력적인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생에 걸친 그의 신념은 정치적 자유주의에 가까웠다. 러시아의 전제권력과 관료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했지만, 그가 자유주의자들의 신념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보수주의자들을 비판했던 것만큼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그의 저서와 논문, 편짓글 등은 소련 말기에 『러시아사 강좌』(전9권)로 출간되었으며, 요즘도 러시아에서 가장 빈번하게 영인본이 나오고 있다. 클류쳅스키의 방대한 연구 가운데 특히 『러시아 신분사』는 그의 연구 경향을 잘 보여주는 명저로, 러시아 역사의 초기부터 18세기까지의 신분 성립과정과 특징을 자세히 설명한다. 클류쳅스키는 이 책을 통해 러시아의 신분적 불평등이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신분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듯이 신분적인 차별이 소멸될 때가 도래할 것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그는 이런 탁월한 연구활동을 인정받아 솔로비요프, 플라토노프와 함께 이른바 ‘러시아 역사학의 황금기’를 개척한 중심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신분적인 불평등은 역사적인 현상이다
『러시아 신분사』는 클류쳅스키의 ‘러시아사 강좌’ 시리즈 가운데서도 널리 알려진 책이다. 클류쳅스키는 1886년 9월부터 12월까지 이 강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새로운 대학규정에 따라 이전의 2년 강좌를 1년 만에 끝내야 했기 때문에 제20강을 넘기지 못하고 끝마쳐야 했다. 그래서 ‘강의 요약과 주요 결론’ 즉 제21강과 제22강은 강의가 끝난 뒤 제자 유쉬코프, 키제베테르(나중에 유명한 역사가가 됨), 스토로줴프에게 받아쓰게 했다. 이리하여 이것을 석판 인쇄한 것이 1887년에 처음 출간된 것이다.

클류쳅스키는 언제나 러시아 사회사, 즉 지배계급인 보야린과 드보랴닌, 그리고 농민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러시아 신분사를 강의하면서 본질적으로 기존 사회관계에서의 부당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회의 신분적 구분의 임시적인 성격에 관한 생각을 전개했으며, 그것이 지닌 잠정적인 의미를 강조했고, “신분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며 그것이 이미 없어지게 될 때가 온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역사적인 예로 서구 유럽의 역사를 지적했다. 이런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는 제2강의 “신분적 차이의 점진적 소멸―유럽 역사의 공통적인 사실”을 단락의 제목으로 선택했다. 그는 신분적 불평등이 역사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달리 말해 그는 신분의 역사는 두 가지, 즉 아주 숨겨져 있지만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두 역사 현상을 드러내준다고 결론지었다. 한편으로는 공통된 이해관계가 창출되는 움직임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공통 이익을 위해 신분적 억압 아래 있던 개인을 해방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는 것이다. 클류쳅스키는 러시아의 긍정적인 역사 발전을 위해 이런 문제가 평화스럽고 점진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랐다.

신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사람들은 학위를 가진 인물들이다
클류쳅스키가 신분사 강좌를 하고 있던 1886년은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정치가 강화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반(反)개혁 움직임이 가시화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진행된 이 강좌의 내용은 시의적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국자의 관심을 끌지 못해서 금지조치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뜻밖이다. 특히 신분사 강좌에서 그가 미래의 러시아에 대해 내린 해석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클류쳅스키는 법제사가들과는 달리 자신이 살고 있던 당시의 국가구조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의 형태야말로 궁극적인 국가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신분사 강좌에서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반복해서 드러냈다. 나아가 그는 『러시아 신분사』의 서론에서 그가 공감하는 미래의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보이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는 자본의 힘이 정치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다른 힘, 예컨대 학문이나 지식에 자리를 내주게 될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힘을 가지고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꿈꾸어왔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그런 꿈을 꾸고 있다. 이러한 힘을 가동하게 될 국가 조직 속에는 평등도 없게 될 것이며 신분도 없을 것이다. 신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사람들은 ‘학위’를 가진 인물로서, 재산에 의한 특권 덕분에 입법기관에 선출된 의원들이 물러나고 학위를 가진 학자 출신 의원들이 들어올 것이다."

클류쳅스키는 더 나아가 현대사회는 개인의 정치적 비중이 투표의 양에 달려 있고, 또 투표의 양은 ‘주식의 보유량’에 의해 정해지는 주식회사 형태로 자신의 국가지배를 성립시키게 된다고 보았다. “미래의 국가는 교사와 학생으로 구분되고, 학생은 상급학생과 하급학생으로 다시 나뉘는 학교의 형태로 건설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더 이상 사회의 동력이 될 수 없게 되고, 지식의 권위로 대체될 것”이다.

민중생활사를 역사 무대의 가운데로 이끌어내다
그러면 『러시아 신분사』에 나타난 클류쳅스키의 논리는 어떤 것일까? 계층의 형성과정과 신분의 발생과정 사이의 상호관계가 러시아 역사발전 과정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 그는 일반적인 역사적 법칙과 점진적인 신분의 균등화를 지적한다. 모든 신분적 구분의 기원은 이전의 구분에서 초래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는 ‘계층’ 또는 ‘사회계층’, ‘신분’이 지닌 본질적인 성격을 설명하면서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하위계층(농민)에게도 적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정치사가 아닌 ‘민중생활사’를 역사 무대의 가운데로 이끌어낸 결과다. 그는 각 계층을 차별화시킨 주된 도구로서 각자가 소유하는 생산수단의 형태와 사회에서 담당한 기능을 지적한다.

클류쳅스키의 역사학은 농노 해방과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당대 러시아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그는 제정 러시아 후반기의 사회경제사 연구를 통해 러시아 역사의 기본 구조를 파악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정리된 연구업적은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 소련 시기에는 그가 부르주아의 이익만을 대변한 대표적인 부르주아 역사학자로 평가받음으로써 그의 역사학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제약이 되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가 제기한 다원적인 역사 이해가 포괄적인 러시아사 이해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러시아 신분사』는 러시아 역사에 대한 클류체프스키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그 가치를 잃지 않는 고전적인 저술이다. 이 책은 그의 방대한 저술 가운데서도 사회사에 대한 학문적 시각의 기본 골격을 형성한 저서라는 의미에서 그의 역사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클류쳅스키 역사학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폭넓은 주제를 다룬 그의 저서는 결코 쉽게 읽을 수 없으므로, 다양한 분석을 통해서만 그의 역사학의 진면목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참 교육자 학산 윤윤기
영원한 청년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