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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참 교육자 학산 윤윤기 2007-04-17
"흑과 백이 맞선 시대에 중간지대의 화합자가 설 땅은 없었는가.
6ㆍ25전쟁 발발과 함께 그는 극우의 첨병이던
경찰에 불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암흑의 시대, 자신과 가족을 돌볼 새도 없이
다만 횃불같이 살다간 그의 삶과 죽음을 이제 처음 소개한다.
이 글은 잘못된 과거사의 진상을 규명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그것을 제대로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발의이며 긴급동의다."


6ㆍ25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후인 1950년 7월 21일, 전라남도 보성군 미력면 예재 고갯길에서 철사줄에 묶인 처참한 주검이 발견되었다. 그의 이름은 학산 윤윤기(學山 尹允其, 1900~50). 민족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좌우의 대립에 휩쓸리지 않고 중도의 길을 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누구에 의해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되었을까?


1. <민족의 참 교육자 학산 윤윤기>가 갖는 의미

1) 민족의 참 교육자 학산 윤윤기, 그를 되살리는 첫걸음
이 책은 역사에 묻혀 잊혀진 존재가 되어가는 학산 윤윤기 선생의 흔적을 복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 유족과 생존한 지인들을 제외하고 학산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학산 윤윤기는 일제강점기 당국의 눈을 피해 민족교육과 민중계몽을 실시하고 몽양 여운형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한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무상교육기관 ‘양정원’을 설립하여 남녀노소 모두에게 배움의 문을 연 근대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했고, 해방 후 단정ㆍ단선에 반대하며 좌우대립의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을 화합하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념과 정치의 혼란 속에서 어이없게 우리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뒤 남겨진 가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 했으며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생전의 업적과 자취는 역사의 먼지에 덮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학산의 이름을 복권하여 다시 세우려는 유족과 후학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그를 기억하는 증인들의 증언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역사의 베일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는 듯했던 학산의 윤곽은 조금씩 뚜렷해졌고 우리가 잃어버릴 뻔했던 목소리와 행적이 이 책을 통해 되살아났다.

2) 근현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윤윤기 선생의 죽음
2007년 4월 14일 안국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거행된 출판기념회에는 학산을 추념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제자들이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스승을 추억했고 논객들이 언성을 높여 민족의 장래를 논했다. 공권력에 의해 해명도, 재판도 없이 살해당한 그의 죽음은 우리 민족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상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어둠 속에 매장되었다. 이 점에서 학산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치부할 수 없다.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대표하는 그의 삶과 죽음의 진상을 추적하는 것은 역사의 그늘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혼을 위로하는 일이다. 그와 같은 작업을 진행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것은 후손들에게 주어진 숙제다.

3) 교육자,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인 윤윤기 선생을 재조명하다
학산이 설립한 양정원은 2,00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학용품과 교과서를 제공받으며 월사금 없이 공부한 무상교육기관이었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활짝 열린 개방학교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공교육의 재구축과 학산의 건국활동으로 폐교된 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나 기억 속에서나 완전히 지워질 뻔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1992년 양정원 터에 비석을 세워 민족교육에 헌신한 학산의 뜻을 기리고 2003년 그가 주검으로 발견된 고갯길가에서 추모위령제를 거행했다. 학산의 둘째아들 윤호철은 아버지의 행적을 좇아 비망록에 꼼꼼히 기록했고 막내아들 윤호상은 피학살자 유가족들의 모임인 ‘전국유족협의회’ 공동집행위원장으로서 억울하게 죽은 피학살자들의 원한을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처럼 꾸준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학산의 생애를 덮은 막을 들춰 억울한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항일독립운동 업적을 밝혀내기 위해 조사를 개시했다. 이 책은 그 막을 벗겨내는 작업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2. 학산은 누구인가

1) 일제 치하의 훈도로서 민족교육을 행한 사람
학산 윤윤기는 1900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유교적인 집안의 가풍에 반발하여 댕기를 자르고 신학문을 배운 그는 전남공립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훈도(訓導,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훈도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풍요가 보장되는 직업이었으나 학산은 지위를 이용하여 안정을 꾀하기보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한글과 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첫 부임지인 안양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교사(校舍)도 없는 천포간이학교에 부임한 학산은 오지에 학교를 세우고 정규과정은 물론 취업교육반ㆍ야학까지 밤낮 없이 교육에 매진했다.

2) 민족교육을 위해 사설학교를 설립한 참된 교육자
1939년 천포간이학교를 떠난 학산은 점점 더 가혹해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마음껏 민족교육을 펼치기 위해 사설학교 설립을 결심했다. 불과 몇 개월 뒤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일왕의 은급(恩級)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학산은 과감히 유혹을 뿌리치고 훈도 자리를 내놓았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유지들과 힘을 모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 무상교육기관 양정원을 세웠다. 양정원은 모두에게 열린 학교, 즉 개방학교였으며 단 한 푼의 월사금도 받지 않는 파격적인 무상교육을 천명했다. 또한 학산은 사비를 들여 학생들에게 연필과 공책 등 학용품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1940년 개원한 양정원에는 예상인원이던 300여 명보다 훨씬 많은 500여 명의 인원이 몰려들었다. 학산은 천포간이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정규과정 외에 야학과 취업교육을 시행하는 등 몸을 아끼지 않고 강행군했다. 광산업으로 양정원의 운영자금을 대고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모두 쏟아 부을 정도로 교육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의료활동을 통해 마을사람들을 구제하고 기생충 예방과 구충사업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활약하며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상처를 치유했다.
양정원은 1947년 폐교할 때까지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내보냈다. 개인의 힘으로 7년 동안 무상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던 양정원의 운영방식은 앞으로 깊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3) 일제의 패망을 예견한 독립운동가
학산의 생애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측면은 독립운동이다. 양정원을 운영하는 동안 그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광산업으로 돈을 벌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한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징병을 거부하고 저항했다.
학산이 남긴 몇 편의 한시는 그가 중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몽양 여운형과 연계하여 건국동맹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여운형과의 긴밀한 관계는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4) 이념을 초월한 단정ㆍ단선 반대주의자
1945년 해방 이후 학산은 분단을 막고 좌와 우가 하나로 어우러진 통일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학산은 여운형과 뜻을 함께하며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ㆍ근로인민당ㆍ시국대책협의회(시협) 등에서 활약했다. 민전에서는 친일파를 처단하는 ‘친일파민족반역자심의위원회’의 위원을 맡았으나 인명을 중시하는 그는 친일의 흔적은 철저하게 청산하되 인명살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고 학산의 염원과는 달리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들어서자 학산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낙향했다. 이후 좌익세력의 무장투쟁이 본격화되고 여순반란사건으로 좌우대립이 심화되면서 학산의 제자들도 양쪽으로 갈려 대립했다. 이념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학산은 양쪽 제자들의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고 균열을 아물리려는 데만 힘썼다.

5) 중간자의 죽음
1950년 6ㆍ25전쟁이 터지자 학산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좌경성향의 친지들을 챙기며 보호하려고 했다. 좌와 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올곧게 한길을 걸어온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익 경찰은 그런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고 1950년 7월 21일 경찰서로 소환, 고문 끝에 살해했다. 시신은 철사줄에 묶여 길가에 버려졌고 그 소식을 들은 일대의 주민들은 통탄하며 눈물을 쏟았다. 이념을 거부하고 오직 민족만을 생각한 학산이 왜 그렇게 살해되어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은 그를 죽인 이들의 침묵을 대신하여 국가와 역사를 향해 소리 내어 묻는다.
‘누가 그의 이름을 지웠는가?’


3. 주요 내용

암흑의 반세기에 타오른 민족의 촛불_책을 펴내며
참혹한 죽음_프롤로그

1. 나라 잃은 백성에게 민족교육을
학산은 누구인가|교육자로서 첫발을 내디디다|천포간이학교 설립에 몸바치다|천포간이학교의 운영체제|배움의 불길을 지피고|떠남, 그리고 새로운 출발

2. 무상교육기관 양정원
종쟁이들녘에 일어선 학교|몰려드는 학생들|드넓은 인간애와 동포애로|양정원의 자금원|민중을 깨우친 목소리|비밀스러운 독립운동|국경을 넘나들며 시를 읊다

3. 통일의 염원을 안고
어지러운 해방정국|신념ㆍ지조ㆍ노력|시국대책협의회 13인|여순반란사건의 폭풍

4. 민족의 별이 지다
학산의 최후|누가 학산을 죽였는가|비극 속의 진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다_에필로그
주요 연보|증언자 및 관계자 명단


4. 지은이 소개

1900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학산 윤윤기는 일제강점기에서 6ㆍ25전쟁까지 이어지는 암흑의 반세기를 치열하게 살아간 민족교육자ㆍ독립운동가다. 1924년 전남공립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졸업하여 안양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33~39년 천포간이학교, 1939~40년 보성보통학교를 거쳐 1940년 4월 12일 무상교육기관 양정원을 개원, 1947년 문을 닫을 때까지 2,000여 명에 이르는 졸업생을 내보냈다. 해방 전까지 몽양 여운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으며 건국동맹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 계열에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여운형의 암살과 이승만 정부의 수립으로 뜻이 꺾였다. 좌와 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자로서 갈라선 민족을 화해시키려 노력하던 그는 6ㆍ25전쟁 발발 한 달 뒤인 1950년 7월 22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향년 51세.

지은이 선경식은 1948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과와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어 4년 7개월 동안 복역했고, 『중앙일보』 기자ㆍ차장ㆍ부장대우를 역임했다. 이후 『노동일보』 편집국 부국장ㆍ편집국장,‘전국언론노조연맹’ 조직국장,‘민족민주운동연구소’ 이사,‘한국정경연구소’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민주화운동공제회’ 상임이사,‘전국유족협의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정치평론가이자 시인으로서 ‘시와 경제’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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