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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리영희저작집)
리영희 지음
2006-08-30 | 한길사 刊
신국판 | 양장 | 608 쪽 | 22,000 원
89-356-5696-8 | 04300
 
이 책은 이럭저럭 열 몇 권 되는 나의 책 중에서, 평론집으로는 일곱 번째가 되는 것이다. 맨 첫 평론선집인 『전환시대의 논리』가 1974년 7월에 출간되었으니까, 정확히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
 
 
이 책은 이럭저럭 열 몇 권 되는 나의 책 중에서, 평론집으로는 일곱 번째가 되는 것이다. 맨 첫 평론선집인 『전환시대의 논리』가 1974년 7월에 출간되었으니까, 정확히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회고하는 마음에 쓰라림과 흐뭇함이 끝없이 교차한다.

『전환시대의 논리』 이후 책을 내놓을 적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못난 것을 선보이는 것 같은 두려운 심정이다. 앞서 나온 책들이 한결같이 각기 찬사와 매도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편안한 날이 없었던 20년을 회상하면서 또 걱정이 없지 않다. 그러면서도 역시, 지난날 나의 책들을 따뜻이 맞아준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의 독자들에게 의지하는 마음으로 이 서문을 쓴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대개 1992년 초부터 최근까지 쓴 것들 이다.

이 기간은 밖으로는 공산주의 체제·국가의 붕괴와 국내적으로는 30년에 걸친 야만적 군부독재체제가 몰락하는 일대 역사적 전환기였다. 내외의 숨가쁜 정세변동에 힘입어서 민족 내부문제도 반세기의 적대적 생존양식에서 평화적 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감동적인 변화를 보여준 기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인류사와, 우리에게는 분단민족사가 질적 변화를 하고 있는 현장에 입회한 한 지식인으로서 그 장엄함에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것 외에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바야흐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과거’가 되어가는 현실변화 앞에서, 형언하기 힘든 충격과 감동과 숙연함으로 서 있어야 했다. 역사 속으로 물러나고 있는 지난날의 ‘현실’ 속에서 일정한 발언과 행위를 해왔던 나의 심경이 그러했다.

1991년 가을에 발간된 여섯 번째의 평론집인 『自由人, 자유인』(범우사)의 끝 줄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 나는 지나온 삶의 한 장(章)을 접고, 새 삶의 장을 열기에 앞서, 잠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건널목에 서 있는 셈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와 세계정세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천지창조를 눈앞에 보면서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보잘것없는 한 지식인의 오만과 불손으로 생각되었다. 앞으로는 새 장을 열 때까지 ‘잠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지(智)적 겸손이고 개인적 분수인 성싶었다. 그리고 지난 3년여 동안 그렇게 노력했고 그렇게 살았다.

사회의 일부에서는 나의 이 같은 심경과 몸가짐에 대해서 ‘책임 회피’라거나 ‘신뢰의 배반’이라고 비판하는, 주로 젊은 층의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듣고 있다. 나는 맞대어 답변하거나 해명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현실상황은 격동을 계속했다. 민족 내부적으로는 급전직하로 공존이 적대로 바뀌고 평화가 전쟁위기로 퇴락했다. ‘핵’문제를 놓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일진일퇴의 협상이 거듭되더니 지금 이 시간에는 미국의 대북한 전쟁행위 불사의 단계에 왔다. 소위 북한 핵문제는 남한의 극우·반공주의·냉전·반평화통일 세력에게 권토중래의 호기로 이용되고 있다. 30여 년에 걸친 민주화·통일 세력의 피눈물 나는 싸움의 열매인 ‘문민정권’도 이들과 동맹을 형성하여 역사를 후퇴시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적으로는 소련이 ‘3등국가’로 퇴락한 결과인 국제적 불안정과, 유일 군사초강국으로 남은 미국의 노골적인 패권주의로 말미암아, 이라크전쟁을 비롯하여 군사적 갈등·충돌·지배의 연속적 상태가 진행 중이다. 격동의 연속이다.

이 같은 국제적·민족 내부적 및 국내의 여러 위기사태는, “지나온 삶의 한 장(章)을 접고 새 삶의 장을 열기에 앞서 잠시 자신을 성찰해야 할 건널목”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나에게도 휴식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의지와는 관계없이 잇달아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견해와 태도와 발언을 강요당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때마다 괴로웠다. 그리고 온갖 이유와 사정을 들어 집필을 고사했다.

실제로는, 공교롭게도 이 기간에 나는 고혈압 증세의 항진, 이어서 심한 척추디스크로 입원치료를 받고 보행 불능 상태가 몇 달 계속되었다. 게다가 만성간염의 악화로 만 1년 이상 통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휴식이 강요되었던 시기다. 자의적으로 그리고 타의적으로, 과거와 같은 무겁고 긴 논문은 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1970년대 초부터, 즉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등을 통해서 지적·사상적 영향을 받은 후배·후학 독자들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독재·자유·인권·통일 운동의 긴 세월의 어느 단계인가에서 구속되고, 고문당하고, 쫓기고, 투옥되고, 불구자가 되고, 죽임을 당한 분들과 그 가족들과 영혼에 대해서 나는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일정한 도의적 인간적 빚을 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 산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내가 빚을 진 그분들이 지금은 신문사의 기자로서, 잡지사의 책임자로서, 출판사의 사장으로서 당면한 사태에 대한 나의 견해와 글을 간청할 때 나는 끝내 고사하지 못하고 꺾이고 만다.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거의 강요에 의해서 쓴 글들이 어느덧 한 권의 책이 될 분량이 되었다. 다시 읽어보니 마음에 차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나의 머리와 육체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어쩌면 독자도 그것을 발견하고 공감할 줄로 안다. 그렇게 이해해 주면 좋겠다.

이 책의 이름을, 책 속의 한 편의 글 제목을 따서 그대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로 하여 독자에게 바친다. 이 제목을 택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20년 전 첫 평론집의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나는 좌·우의 어떤 정치·이데올로기적 권력이건 진실을 은폐·날조·왜곡하려는 흉계에 대항해서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른 모습대로 세상에 밝혀내는 것을 글 쓰는 목적으로 삼고 일관했다. 광적인 반공·냉전·전쟁 애호· 반평화통일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특히 그러했다.

‘진실’은 균형 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左)와 우(右)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맞고, 인간 사유의 가장 건전한 상태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 인식능력과 지식, 사상과 판단력에서 좌·우 균형 잡힌 이상적 인간과 사회를 목표로 삼고 염원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이 책의 글들은, 1991년 가을에 일단 펜을 놓을 때에 말한 “다음의 장”에 해당하는 글들은 아니다. 금년 말로 대학에서 정년퇴직하고 앞으로 건강이 회복되면 그런 글들을 써보고 싶다. 희망대로 될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희망할 뿐이다.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드느라고 수고한 두레출판사의 오랜 벗 신홍범 사장의 노고에 각별한 사의를 표한다.



1994년 6월 15일

미국 정부의 대북한 군사공격 작전 준비 뉴스를 들으며

리영희